이 때 측면 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사회주의 단체중 하나인 '화요회'의 일원이었다.
1925년의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모스크바로 탈출하였다.
1929년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서 교육을 받음.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1933년 다시 체포되었다.
1939년 출옥하여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경성 콤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책임자가 되었다.
1942년12월 일본 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해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박헌영은 8월 17일 서울로 돌아와, 8월 20일 명륜동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열고 '8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박헌영은 장안파에서는 홍남표, 노동우, 최원택을, 여운형파에서는 이강국과 최용달 등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냈으며, 건준에서 다수의 장안파를 제거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장안파는 박헌영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결국 1945년8월 24일 해제되고 말았다. 박헌영은 9월 3일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1]
1946년1월 5일조선공산당 당수로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 내용을 지지하며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 내용은 다음날 조선인민보 등에 보도되었다.
1950년6월 10일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북조선은 남로당 지도자였던 김삼룡과 이주하를 민족주의자인 고당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6월 16일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는 공방이 되풀이되다가 성사되지 않았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