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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第一共和國)은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헌법에 의해 같은 해 8월 13일에 수립되어 1960년 4·19 혁명으로 붕괴되기 전까지의 시기로 대한민국 최초의 공화 헌정 체제이다. 집권 여당은 자유당이다. 1948년 국제 연합(UN)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체제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정부를 구성하고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국내 질서 확립과 일제 강점기 잔재의 청산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런 이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으나 무장경찰대에 의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해산되었다. 이로써 남한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에 실패하였다.

정부 수립을 전후 한 시기에 좌익우익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제주 4·3 항쟁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좌익과 우익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와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전후, 이승만의 독재가 계속되었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었다.


성립 배경 편집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의 회담이 결렬되자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UN)에 상정하였고,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 실시로 정부 수립을 결정하였다.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선거가 가능한 38선 이남에서는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제정한 헌법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1948년 8월 13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1] 제1공화국의 공식적인 수립 이후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실제로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 1월의 일이었다.

한국 전쟁 이전편집

Syngman Rhee

이승만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무소속[2]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상세한 것은 대한민국 제헌국회 참조). 이승만은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초대 내각에 한국민주당 출신을 기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은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제거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통치기간 내내, 행정부의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으나 이승만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1949년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실형을 받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관련 서류가 소실되고 대부분의 피고인이 월북하는 등으로 인하여 항소심이 진행되지 않고 종료되었다. 군정기였던 1948년 4월에 발생한 제주 4·3 사건은 제1공화국 당시에도 이어져 이에 대한 대량학살 등 여러 건의 대량학살이 이승만 정권 시기에 발생하였다. 1948년 10월 19일에는 전남 여수에서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10월 27일 완전히 진압되었고, 이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공모자 색출이 시작,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반란 공모자로 몰려서 살해되었다(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를 계기로 이승만의 반공주의 노선은 강화되어 갔다. 그는 특무대(대장은 그의 오른팔인 김창룡)로 하여금 의심스러운 공산주의자와 북한의 첩보원을 체포하고 고문하도록 하였다(상세한 것은 김창룡 참조.).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자유당이 다수당이 되고 대한민국 제2대 국회1950년 6월 19일 의장단 선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 전쟁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 전쟁입니다.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전쟁이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주로 6·25 전쟁, 6·25 사변이라 부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다른 국가들도 조선전쟁(일본),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 한국 전쟁(Korean War, 미국 등 서구권)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조선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으나, 북조선에서는 남한이 먼저 공격해 왔다는 북침설을 주장한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조선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한국 전쟁 중의 정치편집

1951년 이범석으로 하여금 자유당을 창당케 하였다.(자유당 참조)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남한의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는 1952년 5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을 동원,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시킨 사건(부산정치파동)이 있었으며, 1952년 7월 14일 발췌개헌으로 대통령 선거 방법을 간접 선거에서 직접 선거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1952년 8월 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후보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부통령 선거에서는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데 앞장섰다.[3](자유당 참조)

붕괴편집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 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1954년 5월 31일, 자유당이 장악한 대한민국 제3대 국회가 개원하였고, 11월 27일 사사오입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였다. (자세한 것은 사사오입 개헌 참조) 1954년까지 제1공화국은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를 가졌었으며 그 이후에 이미 부통령이 있으니 국무총리는 필요없다는 의견에 1960년까지 국무총리 직위는 폐지되었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4][5]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후 1956년 5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 후보가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서로 유세를 하는 도중에 민주당 초대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병사했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를 마음대로 못바꿨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인 장면만 내세웠다.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 장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더 큰 권력을 원했고, 이기붕 역시 그러했다. 또한, 1959년에는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을 간첩죄로 사형시켜 버린다.

1959년 2월경향신문》의 컬럼 여적(餘滴)에 실린 글로 인해 관련자들이 내란선동 혐의로 기소되고 경향신문이 폐간 명령을 받았다.(여적 필화 사건)

3.15 대선을 앞두고 대구에서 조병옥의 선거 유세가 있던 1960년 2월 28일, 2·28 대구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대표되는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으며,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에서 이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3·15 마산시위가 일어나고 이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어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가 확산되어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는 발포 명령을 내려, 경무대 앞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혁명으로 정권은 무너져 내려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하여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으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확산되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자유당 정권도 붕괴되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내각 명단 편집

국방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국방 제1대 이범석(李範奭) 1948년 8월 13일 - 1949년 3월 20일
제2대 신성모(申性模)1949년 3월 20일 - 1951년 5월 5일
제3대이기붕(李起鵬)1951년 5월 7일 - 1952년 3월 29일
제4대신태영(申泰英)1952년 3월 29일 - 1953년 6월 30일
제5대손원일(孫元一)1953년 6월 30일 - 1956년 5월 26일
제6대김용우(金用雨) 1956년 5월 26일 - 1957년 7월 6일
제7대김정렬(金貞烈)1957년 7월 6일 - 1960년 5월 2일

내무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내무 제1대 윤치영(尹致暎) 1948년 8월 15일 - 1948년 12월
제2대 신성모(申性模) 1948년 12월 - 1949년 3월
제3대김효석(金孝錫) 1949년 3월 - 1950년 2월
제4대백성욱(白性郁)1950년 2월 - 1950년 7월
제5대조병옥(趙炳玉)1950년 7월 - 1951년 5월
제6대이순용(李淳鎔) 1951년 5월 - 1952년 1월
서리장석윤(張錫潤)1952년 1월 - 1952년 1월
제7대장석윤(張錫潤)1952년 1월 - 1952년 5월
제8대이범석(李範奭)1952년 5월 - 1952년 7월
제9대김태선(金泰善)1952년 7월 - 1952년 8월
제10대진헌식(陳憲植)1952년 8월 - 1953년 9월
서리황호현(黃虎鉉)1953년 9월 - 1953년 9월
제11대백한성(白漢成)1953년 9월 - 1955년 4월
제12대김형근(金亨根)1955년 4월 - 1956년 5월
제13대이익흥(李益興) 1956년 5월 - 1957년 2월
제14대장경근 (張璟根) 1957년 2월 - 1957년 9월
제15대이근직 (李根直) 1957년 9월 - 1958년 6월
제16대민병기 (閔丙祺) 1958년 6월 - 1958년 8월
제17대김일환 (金一煥) 1958년 8월 - 1959년 3월
제18대최인규 (崔仁圭) 1959년 3월 - 1960년 3월 18일
제19대홍진기 (洪璡基) 1960년 3월 - 1960년 4월

외무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외무제1대 장택상(張澤相)1948년 8월 15일 - 1948년 12월 24일
제2대임병직(林炳稷)1948년 12월 25일 - 1951년 4월 15일
제3대변영태(卞榮泰)1951년 4월 16일 - 1955년 7월 28일
서리조정환(曺正煥)1955년 7월 28일 - 1956년 12월 31일
제4대조정환(曺正煥)1956년 12월 31일 - 1959년 12월 21일

재무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재무제1대 김도연(金度演) 1948년 8월 15일 - 1950년 4월
제2대최순주(崔淳周) 1950년 4월 - 1951년 3월
제3대백두진(白斗鎭) 1951년 3월 - 1953년 9월
제4대박희현(朴熙賢) 1953년 9월 - 1954년 6월
제5대이중재(李重宰) 1954년 6월 - 1955년 7월
제6대김현철(金顯哲) 1955년 7월 - 1956년 5월
제7대인태식(印泰植) 1956년 5월 - 1957년 6월
제8대김현철(金顯哲) 1957년 6월 - 1959년 3월
제9대송인상(宋仁相) 1959년 3월 - 1960년 4월

법무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법무제1대 이인(李仁)1948년 8월 2일 - 1949년 6월 5일
제2대권승렬(權承烈) 1949년 6월 6일- 1950년 5월 21일
제3대이우익(李愚益) 1950년 5월 22일 - 1950년 11월 22일
제4대김준연(金俊淵)) 1950년 11월 23일 - 1951년 5월 6일
제5대 조진만(趙鎭滿) 1951년 5월 7일 - 1952년 3월 4일
제6대 서상환 1952년 3월 5일 - 1954년 6월 29일
제7대 조용순(趙容淳) 1954년 6월 30일 - 1955년 9월 15일
제8대이호(李澔) 1955년 9월 16일- 1958년 2월 19일
제9대홍진기(洪璡基) 1958년 2월 20일 - 1960년 3월 23일

문교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문교제1대안호상(安浩相)1948년 8월- 1950년 5월
제2대백낙준(白樂濬)1950년 5월 - 1952년 10월
제3대김법린(金法麟)1952년 10월 - 1954년 4월
제4대이선근(李瑄根)1954년 4월 - 1956년 6월
제5대최규남(崔奎南)1956년 6월 - 1957년 11월
제6대최재유(崔在裕)1957년 11월 - 1960년 4월

농림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농림제1대 조봉암(曺奉岩) 1948년 8월 15일 - 1949년 2월 22일
제2대 이종현 1949년 2월 23일 - 1950년 1월 20일
제3대 윤영선(尹永善) 1950년 1월 21일 - 1950년 11월 22일
제4대 공진항(孔鎭恒) 1950년 11월 23일 - 1951년 5월 6일
제5대 임문환 1951년 5월 7일 - 1952년 3월 5일
제6대 함인섭 1952년 3월 6일 - 1952년 8월 28일
제7대 신중목 1952년 8월 29일 - 1953년 9월 9일
서리 정재설 1953년 9월 10일 - 1953년 10월 6일
제8대 양성봉 1953년 10월 7일 - 1954년 5월 5일
제9대 윤건중 1954년 5월 6일 - 1954년 6월 29일
제10대 최규옥 1954년 6월 30일 - 1955년 2월 15일
제11대 임철호 1955년 2월 16일 - 1955년 8월 29일
제12대 정낙훈 1955년 8월 30일 - 1955년 11월 16일
제13대 정운갑 1955년 11월 17일 - 1957년 6월 16일
제14대 정재설 1957년 6월 17일 - 1959년 3월 20일
제15대 이근직 1959년 3월 21일 - 1960년 5월 1일

상공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상공제1대 임영신 1948년 8월 4일 - 1949년 6월 6일
제2대윤보선(尹潽善)1949년 6월 6일 - 1950년 5월 9일
제3대김훈1950년 5월 9일 - 1952년 3월 27일
제4대이교선1952년 3월 27일 - 1952년 11월 6일
제5대이재형1952년 11월 6일 - 1953년 10월 7일
제6대안동혁1953년 10월 7일 - 1954년 6월 30일
제7대박희현 1954년 6월 30일 - 1954년 7월 5일
제8대강성태1954년 7월 5일 - 1955년 9월 19일
제9대김일환1955년 9월 16일 - 1958년 8월 27일
제10대구용서1958년 8월 27일 - 1960년 4월 8일
제11대김영찬1960년 4월 8일 - 1960년 4월 28일

사회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사회제1대 전진한1948년 8월 1일 - 1948년 12월 24일
제2대이윤영(李允榮) 1948년 12월 24일 - 1950년 11월 23일
제3대허정1950년 11월 23일 - 1952년 1월 12일
제4대최창순1952년 1월 12일 - 1952년 10월 9일

보건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보건제1대구영숙1948년 6월 4일 - 1950년 11월 26일
제2대오한영1950년 11월 26일 - 1952년 2월 5일
제3대최재유1952년 2월 5일 - 1955년 2월 16일

보건사회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보건사회제1대최재유1955년 2월 17일 - 1956년 5월 26일
제2대정준모1956년 5월 26일 - 1957년 6월 17일
제3대손창환1957년 6월 17일 - 1960년 4월 28일

기타 장관 편집

부처 #이 름 임기
체신제1대 윤석구
교통제1대 민희식
무임소제1대 이윤영, 지청천
총무처제1대 김병연
공보처제1대 김동성(金東成)
법제처제1대 유진오
기획처제1대 이순탁
심계원제1대 명세제
고시위제1대 배은희
감찰위제1대 정인보

외교편집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한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인 평화선을 공표하여 한반도 주변의 해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주권을 선언하였다. 이는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이승만은 이를 평화선이라 불렀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이 선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반대하였는데, 특히 당시 일제강점기 이후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일본과는 어로 문제,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문제로 이후 13년간의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평화선 참조)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독도의용수비대가 일본의 순시선으로부터 독도를 방어하는 활동을 하였다.

경제편집

이 시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원화에서 환화로 화폐 단위를 바꾸었다.

사회편집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 사라는 열대저기압 등급 중에서 가장 높은 「카테고리 5급」까지 발달했던 태풍으로, 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추석날 한반도를 강타하여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문화편집

1949년 이승만은 한글 맞춤법을 소리나는 대로 쓰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한글 간소화 파동)을 하였으나 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1955년 주장을 철회하였다. 제1공화국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는 1981년부터 MBC가 방영한 제1공화국이 있다.

함께 보기 편집

주석편집

  1. 제헌국회의 성립과정 등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 제헌국회 항목을 참조할 것.
  2. 당시엔 정당이 정치를 위해 있는 게 아닌 좌우익을 선전하고 다른 한쪽을 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3. 1952년 8·5정부통령~당선시키는데 앞장섰다.: 안희수, 〈서론:정당의 형성이론과 한국정당의 발전과정〉,안희수 편저,《한국정당정치론》(나남, 1995),59쪽.
  4. 강준만 (2004년).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3권》. 인물과사상사, 13쪽.
  5.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김창룡, 일제관동군헌병에서 대한민국특무부대장까지 (김혜진)”,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서울: 청년사, 194쪽. ISBN 978-89-7278-312-1.
대한민국의 역대 정부

제1공화국 | 제2공화국 |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 제5공화국 |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 문민정부 -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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